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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7 16:34

제디아 사모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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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2015 주일오전예배 요1:1-18    - Jede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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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내 마음에 그것이 믿어지는가 그리고 얼마나 인정하느냐가 내 마음에 계속되는 숙제였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면에서 생각보다 트러블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흔히 말하는 왜 응답이 없느냐였다.

 

하지만 말씀으로 들어가보면 신기한 것이 많다. 베냐민 지파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라는 인물이 왕으로 세워졌을 때. 하루는 사울이 치는 짐승 중에 나귀 두 마리가 집을 나가버렸다. 사울은 자기 종을 한 명 데리고 나귀를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길 당신의 잃어버린 나귀를 저쪽에서 본적이 있다 해서 가보니. 그곳에서부터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계획의 시작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고,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우도록 하라는 말씀을 사무엘은 이미 받은 후였을 테다. 아주 평범한 일들 중 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저번에 tv를 보다가 이스라엘의 문서들이 발견된 사건에 대해 본적이 있다. 독일의 자유신학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믿는냐 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었을 때이다. 베두인들족들이 양을 치는데 어느 날 양들이 다 도망을 가게 되었다. 목동은 양을 찾으러 이리저리 다니다가 큰 바위 밑 한 동굴을 찾았다 그곳에 혹시 양들이 들어갔나 싶어 돌을 던져보았더니 무언가에 부딪히는 쨍그랑 소리가 나서 들어가봤는데 양피지에 기록된 이사야서가 1장서부터 66장까지 한 항아리에 다 보관되어 있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문서가 참 많다고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 박해시절 때 숨어서 카타콤 땅굴에서 살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곳곳에 숨겨놓았기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성경이 많다. 독일의 신학자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결론이 났을 때 그 시점에 이 말씀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한 목동이 양을 잃어버려 찾으러 다니다가. 그때 전세계 고고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큰 요동이 일어났었고 세계 전 곳을 다니며 성경을 찾기 시작했다.

 

하나님계획의 모든 시작을 가만히 보면 일상생활과 연결된 것들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 라고 뒤집어놓았다. 현재 우리는 같은 날들이 주어졌다. 한 베두인 목동이 성경을 발견한 것과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옮긴 그 발걸음이 사무엘을 만나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것과 다 같은 맥락이다. 모든 중요한 것들은 우리의 일상과 연결된 것이다.

 

예레미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시지도 않았는데 거짓선지자들이 자기 마음속의 것들을 꺼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파함으로 하나님께 책망을 받은 것이 기록되어있는데. 유럽에 십자군전쟁이 이렇게 일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는데 교황과 왕들의 욕심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목적 하에 자기 힘을 과시하려는 기독교를 빙자한 그들의 행동이었구나 싶다. 나중에는 계속 지니까 죄가 많다는 명분으로 어린아이들을 전쟁으로 끌고 가 희생시켰다. 분명 예루살렘은 돌 하나도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다.

 

늘 생각과 마음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탈환 그곳에 깃발을 꽂는다는 것 엄청난 의미를 가진 거였으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이루는 것의 출발은 일상적인 작은 것으로도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빙자하면서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도 내 마음으로부터 시작 하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 같은 경우는 유럽을 초토화 시킨 사건들이었다. 목자 한 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을 찾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아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우리가”라는 말이 창세기에 많이 나와있다. 삼위일체는 세분이면서도 한 분이시다. 신학자들도 이것이 너무 오묘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성경대로 말하자면 세분은 항상 함께 계셨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도 손님을 가장해서 찾아오셨었고 노아시대 때에도 노아가 은혜를 입게 해서 방주를 짓게 한 것도 그분의 역사이고. 다윗 왕을 세운 것도 그분의 역사이시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핵심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인생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모르게 바기오라는 땅에서 끊임없이 말씀을 들었고. 이 자리에서도 계속 말씀을 계속 듣고 있다. 계속적으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가 발견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다. 감리교 신학사상의 핵심이 바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라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분명 나온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이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가장 자연스럽고 우연적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아는 그곳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땅에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다고 했다. 11절에 보면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과연 우리 마음속에 예수가 그리스도심이, 과연 하나님이 내 인격 영혼 마음 삶 속에 정말 하나님으로 인정되어지고 믿어지는가. 과연 성령님은 모든 우주 역사를 돌리시면서 한 사람에게 임재하시면서 계획을 이루시는데 그 계획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것이 찾아지지 않으면 이 세상의 거대한 불신앙의 물결을 이기지 못한다. 그 곳에는 과학도 문화도 경제도 모든 전문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거대하게 돌아갈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자긍심과 자존심을 가지고 설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시작은 여기서 오늘 결론 내서 찾아봐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의 출발은 그리스도에 대해 계속 듣게 하신 성령님의 인도이다. 그 부분이 인정된다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목동 한 명이 성경을 발견함으로써 세계를 바꿔 놓았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정말로 인정한다면 나의 개인의 역사가 바뀐다. 안 그러면 힘들다. 세상에 나가면 사람에 맞춰야 하고 무엇이 진짜로 있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과 지내야 하고 돈을 안 벌 수도 없고. 아무리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해도 결론이 계속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쪽으로 안 가게 되어있다. 가장 문제가 오래된 신자들이다. 살면 살수록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다. 말은 안 한다 체면 때문에. 중직자가 되도 여기에 걸려 버리면 교회 안에서도 불신자이다. 어느 날 자신을 보면 거부하고 있다. 성령 거역죄는 사하심이 없다 했는데 체질적으로 슬슬 하나님이 안 믿어지고 나와 상관이 없게 되어진다. 그래서 교회 안에 불신자는 세상적으로 타락한 사람들보다 더 악하다고 본다. 근본적인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wbmc멤버들이 이 부분에 결론이 나야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육감으로 아는 것이 아닌 성경 말씀으로 알아야 한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어버려야 한다. 치유라는 것은 믿음이 근본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근본 인격이 되는 것이 치유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다른 지식들이 많이 들어가있다. 영적인 싸움 심리적인 싸움이기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다. 우리하고 구조가 다르다. 바울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복음을 버린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지막 때에 증거가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만 인정하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방인들이다.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들어온 것이다. 바울이 무서운 얘기를 했다. 너희가 접붙임 당한 것을 감사하지 아니하면 끊어내 버리겠다고 했다. 성경을 가만히 보면 굉장히 무섭고 냉정하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붙여졌는데 왜 감사를 안하고 이것을 어떻게 우습게 여기느냐. 끝까지 교만하면 찍어 내버리겠다고 분명이 말했다.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람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불신앙 앞에서는 정말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복음을 더 순수하게 전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의 출발은 하나님을 인정하자이다. 우연히 바기오라는 땅을 가서 이 말씀을 들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분명 뜻이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 복음을 들어서 뒤집어진 것이다. 완전히 변화되어서 지옥에 갈 인생이 천국백성으로 바뀐 것이다. 주역이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접붙이셨다. 이 부분에 정확이 서야 하지 않을까. 여태까지 조금만 하면 바람에 휩쓸리고 이리저리 치이고. 정확하게 하나님이라는 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이다. 이제부터 복음이 있으면, 참 이스라엘이 됐다면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을 계속 읽고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정말 사람하고 그렇게 많이 싸우신다. 오직 하나 때문에. 내가 하나님이고 내가 여호와이다. 내가 너희를 지어서 다 주었는데 어떻게 너희들이 내 말을 거역하고 마음대로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쫓아가서 싸우신다.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영광 때문에 내가 내 이름 때문에 너희들 끝까지 잡겠다 이 말이다. 이 말에 거역 하는 사람은 가차없다. 무서울 정도로. 이런걸 보면서 우리 교회가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라 본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컴퓨터도 안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오류가 난다. 똑 같은 것이다. 첫 번째 가장 근본적인 정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인정한다면 양심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행동이 있다. 바로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귀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받겠다는 자세가 나오게 되어있다. 다른 것에 그렇게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증거인 것이다.

 

바기오에서 소나무를 바라 보면서 바울 서신을 읽는데 그렇게 마음이 기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씀이 살아서 생생하게 내 마음에 담아지더라. 그때는 환경이 참 어려웠을 때였는데 가만히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묵상할 때 참 행복을 느꼈었다. 이번에 한국 와서 성경을 쓰면서 성경의 의미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 이였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가? 많은 말을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나름대로 든 자기 생각과 마음을 끄집어 내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착각하니까 세상과 사람들을 이길 수도 없고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기 힘든 것이다.

 

큰 교회 목회하시는 분들의 특징을 보니까 자기 감정대로가 아닌 성경을 엮어서 말씀을 전하신다. 어떤 목사님은 병 낫는 성경구절만 불러주는데도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왜 응답이 없는가에 맞추면 다 놓친다. 바울은 결국 네로 왕 시대에 순교하였다. 그것이 응답인데 어쩌나. 응답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큰일난다. 안 오면 하나님 안 살아계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참 응답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지는 것, 인정하는 것 그리고 말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어느 날 목자 한 명이 말씀을 발견한 시간표가 우리에게 흘러온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멤버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이 나의 감정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져야 한다.

 

미혹의 영이 강한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속게 되고, 돈 많은 사람 만나면 돈이 그리스도 같아 보일 수도 있는 것이 감정이다. 지정의를 다 합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인정되고 인정한 증거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서 그 힘으로 사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성령충만은 감정이 아니다. 성령님께서도 가장 중요시 여기시는 것이 말씀일 것이다. 이 부분에 획을 그어야 한다. 아니면 일주일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가. 감정에 의해서 느끼는 일주일은 10년이 될 수도 100년이 될 수도 하루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감정이 불신앙과 합쳐지면 사사로운 것에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는 증거들을 보게 된다. 주일에서 다 잃어버린 것이 찾아지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하루하루 하나님을 잃어버린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자란다고 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비밀이 아니면 날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안 살아계심을 찾게 된다. 마귀가 가만히 있겠는가.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때 참소를 한다.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증거 대봐라. 소리는 안 들리지만 그런 의미를 전달받겠지. 그리스도의 생명의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불신자 말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다. 칭찬도 마귀의 소리로 들릴 때가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중에 정확하게 시간표가 들어맞는다. 안 그러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갉아먹고 인정하지 않는 벼랑으로 달려가는 꼴이다. 주지도 않은 말을 자기 마음에서 끄집어내서 그걸 붙잡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가장 못나고 부족하고 이방인들인 우리가 이스라엘의 참 감람나무인 그리스도에 접붙임 받아서 그 젓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런 정확한 정체성을 정리하고 결론 맺기를 바란다. 자신의 영적 문제를 인정하고 알고 있는 것도 부족하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고 거짓되었다.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믿는가. 내가 만약 아주 가난하다면 부잣집에 갔을 때 미혹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으로 가득하면 부나 가난이나 다 허상덩어리로 보인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관계가 형성이 제대로 되어 성령의 말씀이 가슴에 확 못박히길 바란다.

승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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