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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경쟁 아닌 몰입, 결과에 초연한 엄마에게 배웠죠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어머니 최현숙 교사


아이는 세 돌이 되기 전에 혼자 한글을 뗐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동요든 가요든 가곡이든 한 번 듣고 정확하게 따라 불렀다.

피아노를 가르치려 했지만 학원마다 아이가 너무 어리다고 거절했다. 얼마 되지 않아 집 앞 상가에 피아노 학원이 새로 생겼다. 이곳에서 아이가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다섯 살, 만으로 세 돌 반이 막 지났을 때다. 피아노를 배운 지 한 달쯤 됐을까. 피아노 선생님이 집으로 뛰어왔다. “절대음감이다”며 “악보를 보는 대로 쳐댄다”고 놀라워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30)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손씨의 어머니 최현숙(56)씨는 “열음이의 재능을 발견했을 때, 놀라움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꼈다”고 말했다.
 

아이의 재능을 사장하지 않고 꽃피워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우직한 사람이 산을 옮긴다)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최씨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이를 다그치고 몰아세우는 대신, 천천히 멈추지 않고 나아가게 도왔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자기 일도 놓지 않았다. ‘젊은 거장’으로 성장한 딸은 “내가 자식을 낳게 되면 엄마와 똑같은 방법으로 키우고 싶다”며 “여자로서도 엄마로서도 정말 멋있다”고 말한다.

일희일비 안 하는 엄마   콩쿠르 우승해도 탈락해도 똑같이 대해 모든 이가 다양한 재능을 펼치며 산다고

 

네 재능만 특별한 게 아니라고 강조했죠

독립적으로 자란 손열음   엄마가 나만 보며 희생하지 않아 좋아

열 살 때 차이콥스키 콩쿠르도 홀로 가  순위 초연, 한 번도 비교당한 적 없어요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인연이 깊다. 그의 존재가 대중에게 처음 알려진 게 1997년 러시아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청소년 콩쿠르’에서다. 초등학교 5학년, 만 열 살 나이에 참가해 최연소로 2위에 올랐다. 그것도 1위가 없는 2위였다. 2011년엔 성인의 모습으로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무대에 다시 섰다. 준우승과 함께 최고연주상을 받았다. 지난해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 최초로 우승을 거머쥐기 전까지 국제 콩쿠르에서 국내 피아니스트가 거둔 최고의 성적이 손열음의 것이었다.

97년, 천재 소녀의 화려한 데뷔를 알렸던 러시아 대회에는 손열음 혼자 참석했다. 참가자 중 손열음이 가장 어렸고, 옆자리에 엄마가 없는 참가자도 손열음뿐이었다. “엄마가 학교 선생님인데, 콩쿠르 일정이 딱 개학 직전부터 학기 초까지 가장 바쁜 기간과 겹쳤어요. 바쁜 엄마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게 무리였기 때문에 제가 혼자 갈 수 있다고 했죠. 사실 외환위기(IMF)로 아버지 사업도 위태로웠던 시기라 경비도 부족했고요.”

비행기로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국내선으로 환승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에 내려 다른 나라 참가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대회장으로 이동해야 하는 코스였다. 러시아어는커녕 영어도 못 하는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혼자 찾아가기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어린 딸이 외국 무대에 나가 고군분투해 상을 받았다면 여느 어머니라면 눈물부터 흘릴 법도 하다. 손열음은 “내가 2등을 했다고 전화했을 때도 엄마는 차분했다”고 기억한다. 어머니 최현숙씨는 “열음이가 혼자 잘 견뎌준 것이 대견하고 고마울 뿐, 상을 받은 것 때문에 기분이 더 좋아진다거나 상을 못 받았다고 속상하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고 말했다.

손열음은 “우리 엄마는 원래 그런 분”이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담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음악이란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몰입하는 일이라 생각하게 된 것도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어머니 덕분”이라고 했다.

 

 

어머니와 딸은 서로를 “가장 친한 친구”라 표현한다. 어머니는 “열음이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말귀를 잘 알아듣는 아이”였다며 “사춘기 때도 반항 한 번 없이 엄마에게 깊은 속내를 털어놔 고맙다”고 말한다. 딸은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감정에 치우침이 없이 항상 넉넉한 마음을 유지한 엄 마가 대단하고 멋진 여성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고 얘기했다. [사진 손열음]


오후 11시 퇴근하는 워킹맘

최씨는 35년째 교편을 잡고 있는 베테랑 국어 교사다. 일주일에 세번은 오전 7시에 출근해 야간 자율학습 감독까지 마치면 오후 11시가 넘어야 겨우 집에 들어오는 치열한 워킹맘이었다. 손열음은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바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었다”고 말했다.

대개 아이가 예술 분야에 영재성을 보이면 엄마가 24시간 아이와 동행하며 일정을 관리해주는 경우가 흔하다. 영재성이 사그라지지 않으려면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고 때에 맞춰 대회에도 내보내 기량도 검증해야 하니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씨 역시 “꼭 필요한 순간이 오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에게 도움을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만 세 살 때부터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1년 만에 독주회 무대에 설 정도의 수준에 이르자 최씨의 고민도 깊어졌다. 여섯 살이 되자 학원에서도 “더 좋은 스승이 필요하니 서울에서 개인 레슨을 받으라”고 권하며 전문가를 소개해줬다. 최씨는 학교 수업 일정을 조정해 일주일에 한두번씩 강원도 원주에 있는 집에서 서울까지 차를 몰고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장거리 레슨을 받은지 1년쯤 지났을 때, 최씨는 아이를 위해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면 지금이 적기다 싶었다. 딸을 불러 앉혀놓고 진지하게 물었다. “엄마가 이제부터 학교 그만두고 열음이랑 종일 같이 다닐까? 레슨받으러 갈 때 만나는 다른 애들 엄마처럼 말이야.” 일곱 살짜리 어린 딸은 단호한 목소리로 “싫어”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가 ‘선생님’인 게 좋다”는 것이다.

최씨는 그 뒤로 한 번도 학교를 그만둬야겠다는 고민을 안 했다. 대신 딸을 위해 ‘더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손열음은 “주위에서 엄마를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어린 시절 나에겐 자부심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집에는 늘 엄마의 제자들이 찾아왔다. 대학생도 많았고, 졸업한 지 오래된 어른들도 자주 들렀다. 방학 때면 엄마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집에 놀러와 같이 공부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늘 ‘나도 엄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그때 만약 엄마가 나 때문에 학교를 그만뒀다면, 평생 엄마에게 빚진 것 같은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천재를 천재처럼 키우지 않았다

 

사진 모노그래프 매거진, 김경록 기자


손열음은 엄마에게 가장 감사한 일로 “나를 평범하고 무던하게 키워준 것”을 꼽았다. 사실 손열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혼자 한글을 깨치고 절대음감을 지녔으며, 초견 능력이 탁월해 악보를 한 번 보고 바로 암기해 연주가 가능하다. 어린 시절 그는 국제 대회마다 ‘최연소 우승자’란 타이틀로 불렸고, 성인이 된 뒤엔 ‘강렬한 타건과 화려한 테크닉’ ‘깊이 있고 풍부한 음악적 해석’ 등 온갖 미사여구가 따라붙는 천재 피아니스트다.

천재라 불리는 딸을 대하는 최씨의 태도는 그저 담백하다. 손열음은 “엄마에게 저는 그냥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아이’일 뿐”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기본적으로 피아노를 잘 치는 거, 공부를 잘하는 거, 사진을 잘 찍는 거 모두 똑같은 재능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피아노를 잘 친다고 다른 부분까지 남보다 낫다고 부풀려 평가해준 법이 없었죠.”

국제 콩쿠르에서 1등을 하는 날이나, 국내 콩쿠르에 나가 입상도 못 한 날이나 딸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대회를 앞두고 있다고 해서 연습량을 무리하게 늘린 적도 없고,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연습을 빼주거나 옷을 사주는 등 상을 주는 법도 없었다. 최씨는 “대회나 순위와 상관없이 그저 매일 연습할 분량을 꾸준히 지키게 한 게 내가 한 일의 전부”라고 말했다.

연습도 무리하게 시키지 않았다. 하루 3시간 정도 꾸준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정도로 연습량을 정했고, 그것도 하기 싫은 날은 만화책 보면서 슬슬 요령도 피워가며 할 수 있게 뒀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훈육하는 대신, 큰 그림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풀어두는 게 최씨의 양육방식이었던 거다.

손열음이 중학교(원주여중)를 졸업 후 곧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했을 때의 일이다. 친구들이 서로의 연주 실력을 비교하고, 좀 더 잘하는 학생은 추앙하고 실력이 부족한 학생은 스스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연주를 잘한다는 건 그냥 기술이 좋은 것일 뿐인데, 그게 그 사람의 전부인 양 판단하며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패감에 빠지는 모습이 너무 이상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내가 성격이 무던한 편인데 그 성격이 단지 내가 타고난 게 아니라, 순위에 초연하고 매사 나를 과대평가하지 않았던 엄마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손열음의 가족. 어머니와 손열음이 오른쪽, 앞은 둘째 여동생 새은씨. 왼쪽엔 아버지, 뒤쪽은 남동생 의연씨다. 삼남매이름은 모두 어머니 최현숙씨가 지었다. 열음은 ‘열매 맺음’이라는 의미의 순한글이다. 새은은 ‘새로운 은혜’, 의연은 ‘의연한 믿음’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아이를 키울 때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어머니 최현숙=“교사 생활을 오래 한 덕분인 것 같다. 교사가 되고 처음 발령받은 곳이 남자 중학교였다. 엄마들이 아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쏟는 일이 많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이가 중학교에 와서 사춘기를 겪으면 더 철저하게 부모에게서 독립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엄마의 관심이 컸던 아이일수록 더 엄마를 귀찮아하고 떨어지려고 애를 쓰더라. 엄마는 그 모습이 섭섭해서 학교를 찾아와 눈물을 쏟고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며 내 아이를 키울 때 과도한 관심을 주는 것보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이와 엄마 사이의 적정한 거리란 게 뭔가.

딸 손열음=“엄마는 한 번도 나와 동생에게 뭘 강요한 적이 없다. 우리에게 굉장히 따뜻하게 해주고 긴밀한 관계지만, 우리만의 세계에 엄마가 들어온 적이 없다. 이런 일도 있었다. 독어독문과에 다니는 남동생이 독일에 있는 내 집에서 나와 1년반 정도 지낸 적이 있다. 학교까지 휴학하고 독일에 와 있으면서 그냥 집에만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조심스럽게 ‘미술관이나 음악회라도 가봐’라고 했는데 동생이 스트레스를 받더라. 엄마에게 그 얘길 했더니 ‘애를 그냥 두던가, 그렇게 신경 쓰이면 한국에 보내라’고 하시더라.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시간을 주는 게 엄마의 방식이다. 사실 엄마가 나에게도 늘 그렇게 시간을 줬다.”

어머니=“엄마는 절대 아이의 속도보다 앞서 나가면 안 된다. 반드시 지켜야 할 울타리를 넓게 쳐두고, 그 안에서는 조금 요령도 피우고 게으름도 부릴 수 있게 눈감아 주는 게 좋다. 엄마 눈에는 답답할지 모르지만, 아이는 조금씩 자기가 스스로 일어설 힘을 기르고 있는 거라 믿는다.”

-음악계는 조기유학이 흔하다. 외국 유학은커녕 서울이 아닌 강원도 원주에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키웠다.

어머니 =“만약 서울의 유명 예술중·고교에 보냈다면 비슷비슷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 사이에서 경쟁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다. 그리고 사실 중학교 때까지는 아이가 피아노를 탁월하게 잘 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내 눈에는 진짜 잘 치는 거고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국내 콩쿠르 나가 상을 자주 타는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는 보통 수준인가 보다 생각했다. 원주는 내 고향이고 시골이라, 열음이가 피아노 치는 걸 보는 사람마다 격려해주는 분위기였다. 시기와 질투, 경쟁심 대신 격려와 칭찬 속에 학창시절을 보낸 게 열음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쳤을 거다.”

딸=“나는 원주에서 자랐던 게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피아노를 치면서 한 번도 누구와 비교당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악보만 보고 열심히 연습할 수 있었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몰랐다. 내가 피아노 연주를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즐기고 좋아할 수 있었던 건 원주에서 생활한 덕분인 것 같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모녀관계도 전쟁 같은 사춘기가 있었을 법한데.

어머니=“열음이는 사춘기가 없었다. 아마 대화를 많이 한 덕분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굉장히 대화가 많은 모녀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내내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아이를 데리고 서울까지 데리고 다니면서도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대한 각자의 감상평도 얘기해보고, 서로의 학교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며 왕복 4시간 내내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때의 습관이 지금도 이어지는 것 같다. 열음이와 대화를 할 때 유의했던 점은 있다. 너의 재능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능력을 펼치며 살아간다는 걸 강조하며 타인에 대한 존중을 심어주려 했다.”

딸=“어렸을 때는 엄마가 ‘무조건 내 편’이 아니고, 선생님처럼 냉철하고 객관적인 얘기만 하는 게 서운했던 적도 있다. 나는 엄마 딸이지 학생이 아닌데, 엄마는 내 이야기에 한 번도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었다. 엄마의 그런 면에 서운했던 건 어릴 때 잠깐이었고, 나도 나이가 먹다 보니 인간 대 인간으로 엄마를 바라보면 멋있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면 엄마처럼 못할 것 같다.”

-직장을 그만두지 않은 걸 후회한 적 없나.

어머니=“정말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오면 직장을 그만두고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태 그 순간이 오지 않았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일을 놓지 않았던 게 아이의 성장에 도움을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열음이는 내가 레슨을 데리고 다니거나 콩쿠르에 동행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마가 바쁜 일정을 쪼개 자신을 돌본다고 생각해 고마움을 느꼈다. 또 엄마가 따라다니지 않으니까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주는 분들이 나타나 아이를 이끌어준 것 같아 감사할 때가 많다.”

딸=“엄마가 나 하나만 바라보고 나를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엄마도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만약 나를 위해 엄마의 인생을 내려놨다면 그 부담감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엄마의 보살핌을 덜 받은 것도 아니다. 레슨받는 날이면, 엄마는 수업을 오전에 다 끝내고 나를 데려다줬다. 오히려 동생들이 나 때문에 엄마의 관심을 못 받은 것 같아 미안할 뿐이다. 동생들에게 더 관심을 두고 잘해주고 싶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엄마가 나에게 해준 모든 것이 감사하다.”

 

손열음

1986년 강원도 원주 출생

93년 강원도 원주 초등학교 입학

97년 ‘러시아 차이콥스키 청소년 국제 콩쿠르’ 최연소 2위

99년 ‘오벌린 국제 콩쿠르’ 최연소 1위,

‘대한민국 장한청소년 문화적 감성 부문 대상’

99년 강원도 원주여중 입학

2000년 ‘이화경향음악콩쿠르’ 1위

2001년 ‘독일 에틀링겐 국제 피아노 콩쿠르’ 최연소 1위

2002년 서울 한국예술종합대학 입학,

‘이탈리아 비오티 국제 콩쿠르’ 최연소 1위

2003년 ‘한국음악협회 한국음악상’ 신인상

2004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제1회 금호음악인상’ 금호음악인상

2005년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콩쿠르’ 3위

2006~현재 독일 하노버국립음악대학 최고연주자과정 재학 중

2009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2위

2011년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2위

존경하는 인물 : 엄마. 내가 부모가 된다면 엄마가 나를 키운 방식 그대로

나의 아이도 키우고 싶다.

좋아하는 책 :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토마스 만과 같은 대가들이

음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볼 수 있는 작품)

중앙일보

 

출처: http://zum.com/#!/v=2&news=002201605253081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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