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현장 보고)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 이기풍 목사

by 안젤라 posted Apr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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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풍 목사님은 1868년 11월 21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치 있고 슬기로워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납고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혈기가 왕성해지자 사나운 기운을 여지없이 발휘하기 시작하였고 박치기의 명수로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또한 그는 돌팔매질을 잘하여, 매년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석전에서 동편 대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1885년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왔고, 평양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위정척사운동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서양인을 경계했고 청년 이기풍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기풍은 집을 나서다가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이기풍은 그의 도도해 보이는 몸짓이 싫어서 친구들과 떼지어 몰려가 그의 집에 돌을 던졌습니다. 집안의 모든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돌을 다 던져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한 달 뒤, 장터를 거닐던 이기풍은 그 서양인이 무슨 책을 들고 서투른 조선말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발 밑에 있는 돌을 찾아서 있는 힘껏 날렸습니다. 날아간 돌은 마펫 선교사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이기풍은 평양성을 빠져나와 원산으로 갔습니다. 지나가는 스왈른 선교사를 보게 되었는데 돌로 쳤던 마펫 선교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마루에 누워 그 일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분이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서 엎드렸습니다.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가 자꾸만 머리에 맴돌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지만 어떻게 그분의 증인이 되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스왈른 선교사를 다시 만나게 되어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이기풍은 스왈른 선교사의 조사 역할을 하며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각종 행정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스왈른 선교사가 함경도 지역 순회선교를 시작하자 이기풍은 낮에는 성경을 보급하며 복음을 전하고 저녁에는 복음에 관심 갖는 사람들을 숙소에 모아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기풍은 1903년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후 목사안수를 받고 초대 한국인 목사 7인 중의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가 공부를 시작할 즈음 그는 마펫 선교사의 소개를 받아 ‘윤함애’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목사안수 후, 총회에서 이기풍 목사님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자신이 제주도 선교사로 결정된 뒤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외국과 같은 땅이었고, 말도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제주도 사람들은 예수교를 굉장히 꺼려하였고 집안에 있는 뱀을 숭배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가 떠나기를 주저하자 윤함애 사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누가 그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겠소?” 이기풍 목사님은 윤함애 사모, 마펫 선교사의 격려와 기도로 마음을 정하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1908년 2월, 이기풍 목사님이 선교사로서 제주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쉴 곳도 없고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그는 몸이 점점 쇠약해졌고 배고픔에 바닷가로 향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녀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는 며칠 동안 그 해녀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는 복음을 영접하고 제주도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이기풍 목사님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얻고자 일을 도와주러 다녔습니다. 농사꾼들 틈에 끼어 열심히 일을 하다가 낯이 익고 친해지면 그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이기풍 목사님의 열정과 제주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섬김은 닫혔던 마음들이 열리게 하였고 하나 둘씩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도 중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우상숭배 근절을 위해 ‘구렁이 때려잡기 운동’을 하다가 제주도 사람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며 이기풍 목사님의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영육이 모두 약해진 이기풍 목사님이 평양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고, 마펫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기풍 목사, 편지는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는 분투 노력하시오.” 이 편지를 읽은 이기풍 목사님은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고 그는 성령충만한 가운데 걸고 영적 투쟁을 감당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도에 많은 복음의 씨를 뿌린 결과, 선교를 시작한지 5년 만에 제주도의 교인은 410명, 예배당 3개, 기도회 처소가 5곳, 매주 모이는 성도가 300여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934년경부터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천주교, 감리교에 이어 1938년 9월에 장로교까지도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개인 혹은 소집단적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는데, 이기풍 목사님 역시 신사참배에 격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죽어도 절하지 말라며 순수한 신앙을 가질 것을 항상 강조했습니다. 심한 고문으로 초죽음 상태가 된 이기풍 목사님은 출감조치가 결정되었음에도 나머지 목사들이 출감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결국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여수 남면 우학리 섬의 목사관으로 옮겨졌고 마지막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일주일 뒤 1942년 6월 20일에 그의 줄기찬 선교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