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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앨러스 선교사님은 1880년도부터 1920년도까지 한국에서 간호사로 선교하신 분입니다. 1860년에 미국에서 장로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나 페르시아 선교사로 갈 계획으로 보스턴 의과 대학을 다니던 중 한국으로 와달라는 알렌 호레이스 선교사님의 요청과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1886년 한국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는 다음 해인 1887년에 벙커 선교사님과 결혼하시는데 이분은 교육선교와 옥중선교로 한국의 지도자들을 키워내신 분이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이분의 제자라고 합니다. 앨러스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일하시며 제중원 의사, 명성황후 주치의, 정신여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십니다.  

 

첫째로 유교사상이 팽배하던 당시 한국은 남자 의사가 여자 환자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시면서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명성황후가 병들게 되었는데 당시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 있던 알렌 선교사님은 직접 진찰을 할 수 없어 대략적인 증상만 듣고 약을 지어 드렸는데 두 차례 해도 차도가 없자 앨러스 선교사님을 추천하시며 진찰하도록 합니다. 그 후 계속적으로 명성황후 주치의로 활동하십니다.
 

두번째로 교육사역인데 1887년에 언더우드 학당에 고아가 몇 명 들어오게 됩니다. 여느 때와 같이 씻기고 옷을 입히는데 한 아이가 여아임을 알고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곧바로 앨러스 선교사님이 거주하는 집으로 보내 교육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해 겨울에는 학생이 3명으로 늘었고 이것이 정동 여학교의 시작이 됩니다. 또한 한국 YWCA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창설에 협력하여 5천엔의 창립 기금을 헌금하기도 했습니다.

 

1926년에 40년간 선교사직을 은퇴하여 귀국하시고, 남편인 벙커씨가 사망하자 한국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남편의 유해를 가지고 다시 한국으로 오십니다. 1938년에 돌아가셔서 양화진 묘에 안장되었습니다. 두 분의 묘비에는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벙커 선교사님은 ‘날이 새고 흑암이 물러갈 때 까지’, 앨러스 선교사님의 묘비에는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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